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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태조 이성계

투데이_시크릿 2022. 11. 19. 18:05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에 대해 소개하려고 한다. 이성계는 고려 충숙왕 복위 3년 1335년 10월 27일 동북면 화령에서 태어났다.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은 원의 쌍성총관부 만호였다. 어느 날 당시 쌍성총관부 만호 이자춘이 꿈을 꾸었는데, 꿈 속에서 하늘에서 오색구름을 타고 선녀가 내려왔다고 한다. 그 선녀는 이자춘에게 절을 하고 "천계에서 그대에게 내리는 것이니, 장차 이것을 동쪽 나라를 측량할 때 쓰십시오."라며 소매 속에서 침척을 꺼내 바쳤다. 이자춘이 그 자를 받은 뒤에 부인 최씨는 임신을하였고, 이후 아들인 이성계를 낳았다고 한다.

이성계 또한 어릴 때 꿈속에서 신인이 나타나 금으로 된 자 즉 금척을 주면서 "이 금척으로 삼한 강토를 헤아려 보아라"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시간이 흘러 장성하여 진안 마이산에 들르게 된 이성계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되는데, 산의 풍광이 어릴 적 꿈 속에서 신인이 나타나 금척을 주었던 곳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이성계의 어린시절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태어날 때부터 우뚝한 콧마루와 임금다운 얼굴로서, 신체는 영특하고 준수하며, 지략과 용맹은 월등하게 뛰어났다고 한다.

어린 시절 고향인 화령에서 살았다. 북방 민족들이 매를 구하러 주로 내려왔는데, 흔히 말하길 "이성계와 같이 걸출한 매를 얻고 싶다"라고 하였다.

고려의 무신 가문 출신인 이성계는 어릴 때부터 영웅의 기질을 타고나서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며, 용맹하여 수많은 전쟁터에서 전공을 세웠다. 특히 활을 잘 쏘아서 '신궁'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천하의 명궁으로 알려졌다. 궁술과 전장에서의 그의 활약상에 관해서는 여러 영웅담이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으며 이성계는 30여년 동안 전장에 나아가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는데, 다만 군왕과 군인역에서 은퇴후 자신의 아들인 이방원과의 싸움인 '조사의의 난'에서는 크게 패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성계의 군대가 전장에 나아갈 때는 대라를 부는 특유의 의식이 있었는데, 적들이 멀리서 그 소리만 듣고도 바로 이성계가 왔다는걸 알고 공포에 젖기도 하였다.

 

 이성계는 특히 활을 잘 쏘았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황산대첩에서 이성계는 약 15세 가량의 아기장수라는 왜구 소년장수의 활약으로 고전했다. 이성계가 화살로 아기장수의 투구 상단부위를 맞추자 투구가 기울어졌다. 당황한 아기장수가 이를 바로 잡으려고 하자, 이성계는 또 다시 투구 상단부위로 화살을 날렸고 투구가 완전히 벗겨졌다. 아기장수의 이마가 드러나게되었고 이지란이 화살에 맞아 죽여버렸다.

 또한 황상과의 대결도 유명하다. 황상은 공민왕을 도와 기철을 숙청하고 홍건적에게서 개경을 탈환하여 1등 공신에 오른 인물이다. 또한 예전에 원나라 순제 앞에서 활로는 세계 최강이라는 몽골의 궁수를이겨 버린 적이 있었다. 원나라 순제가 놀라 "팔이 어떻게 생겼길래 활을 잘 쏘냐?"며 황상의 팔을 직접 만져볼 정도였다. 그런 황상과의 대결에서 이성계와 황상은 50발까지는 둘이 막상막하였으나, 50발이 넘어가자 황상의 활이 빗나가기 시작했다고한다.

 

고려 공민왕 5년 1356년 유인우가 이끄는 고려군이 원의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공민왕은 원나라에 부역하던 조씨와 이씨에게 조상의 죄를 씻을 기회를 준다고 하여 공민왕에 투항하여 아버지 이자춘과 함께 공을 세웠고, 5년 뒤에 이자춘이 죽자 아버지의 벼슬을 이어받아 금오위상장군·동북면상만호가 되었다.

1361년 공민왕 10년 음력 10월에 독로강만호 박의의 반란을 진압하였으며, 같은 달에 다시 압록강의 얼음을 이용하여 홍건적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의 영내에 침입하여 삽시간에 수도가 함락되자 이성계는 휘하의 고려인 및 여진족 으로 구성된 강력한 친병 조직 2천명을 거느리고 수도 탈환 작전에 참가하였다. 또한 이들 대부분은 기병이였다. 개인 병력으로만 수많은 전장에서 단련된 수천의 기병을 거느린 이성계의 군사력은 위협적이며 압도적이였다. 이성계는 현표, 사자황, 응상백, 용등자, 발전자, 추풍오, 횡운골, 유린청 등 '팔준(八駿)'이라 불리는 여덟 마리 애마를 타고 다녔다.

 

1362년 공민왕 11년 심양행성승상을 자처한 원의 장수 나하추가 수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함경도 홍원 지방으로 쳐들어와 기세를 올리자, 고려에서는 이성계를 동북면 병마사로 삼아 적을 막게 하였다. 여러 차례의 격전 끝에 마침내 함흥 평야에서 원 군대를 격퇴시켜 명성을 크게 떨쳤다. 적장인 나하추마저 이성계의 뛰어난 용맹과 탁월한 군사적 재능에 감탄하며 깊이 존경을 자아낼 정도였다고한다.

1364년 공민왕 13년 원나라의 기황후가 최유를 시켜 원의 군사를 이끌고 공민왕을 몰아내고 덕흥군을 세우려고 압록강을 넘어 침입하자 최영 등과 함께 이를 막았고, 이 직후 함주를 침공한 여진족 김삼개, 김삼선 형제를 격퇴하여 밀직부사에 임명되었으며, 1370년 공민왕 19년 원의 동녕부를 원정하여 국토를 확장하였다. 이성계는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사흘에 걸쳐 도강한 후, 진군하여 요동성을 점령하였다.

 

1388년 우왕 14년 철령 이북 영토 문제를 두고 명나라와 갈등이 빚어지자,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우왕은 명나라 요동 정벌을 명하였다. 당시 우군도통사로서 요동 정벌을 위하여 북진하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정권을 장악하였고, 공양왕에게서 선위 형식으로 개경 수창궁에서 즉위하였으며, 조선을 개국하였다.

조선을 개국한 후에 '단'으로 개명하였다. 조준과 정도전을 비롯한 혁명파 신진사대부들과 전제 개혁을 비롯한 각종 사회 개혁을 단행한 끝에 조선을 개국했고, 수도를 한양으로 천도하여 왕조의 기틀을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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